MEME 이해하기: 단순한 복제와 전파를 넘어서, 예술이면서 동시에 반예술
저자: Felipe Daniel Montero
번역: Litfour소4
본문은 밈(meme)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밈의 본질은 무엇인가? 고대 교의에 따르면 어떤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이 무엇인지 정의한다.
그러나 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사소해 보일 수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밈은 단지 밈 이미지일 뿐이며, 복제와 재창조를 통해 퍼져 대중에게 유머를 제공하는 것이다. 위키백과에도 이미 답이 나와 있는데 왜 굳이 이런 질문을 해야 할까?
위키백과의 정의는 우리가 밈에 대해 미리 갖고 있는 관념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인터넷 밈, 또는 밈이라 불리는 것은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문화적 요소로, 일반적으로 유머 목적으로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공유된다."

비록 그러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묻고자 한다. 밈은 새로운 종류의 코미디 형식인가?
많은 밈들은 전혀 웃기지 않지만, 아무도 그것들이 밈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밈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며, 이 과정에서 밈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
만약 인간 존재가 밈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면, 그 관계는 자유로울 것이다. 추상적인 정의에 의존하지 않고 사물을 직접 마주할 때에만 우리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추상적인 정의는 밈이 진정한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을 미리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키백과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사물의 본질이 우리 손 안에 있지 않을 때, 언어는 이해를 돕는 도구가 된다. 원초적인 명명 행위에서 사물의 본질은 이름 붙이는 지침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meme'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밈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밈이 처음 이름 붙여졌을 당시에는 의미가 이름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의미를 부여했다.
사전을 찾아보았다: 명사(noun): 밈(meme); 복수형: memes.
모방이나 기타 비유전적 수단을 통해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문화적 또는 행동 양식의 요소.
이미지, 짧은 영상, 텍스트 등으로, 일반적으로 유머를 포함하며 인터넷 사용자들 사이에서 신속하게 복제되고 전파되며, 전파 과정에서 약간씩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 20세기 70년대 용어: 그리스어 mimēma ‘모방된 것’에서 유래.
‘meme’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mimēsis에서 비롯되며, 이를 ‘모방’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mimēsis를 단순히 ‘복제’로 이해하는 것은 부족하다. 디지털 시대에는 정보가 끊임없이 복제되는 것이 기본이다. 엄밀히 말해 매개체의 결핍 때문에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모방이 아니다.
사전은 거의 밈의 본질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밈은 이미지, 동영상, 텍스트 등의 형태로, 보통 유머를 담고 있으며 인터넷 사용자들에 의해 빠르게 복제·전파되며, 보통 약간씩 다르게 변형되어 전달된다.”
확실히 밈은 복제되지만, 그것은 단지 전파 방식일 뿐이다. 기존 패턴에 차이가 도입될 때 밈은 재창조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혹은 더 엄밀히 말해, 밈은 일종의 패턴인가?
우리가 밈을 마주할 때 단지 하나의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인가?
매 밈 이미지를 경험할 때마다, 우리가 그것을 밈으로 받아들이려면 반드시 사전에 익숙한 패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듯하다. 각 밈 이미지는 두 가지 구별 가능한 요소를 포함한다: 밈 패턴과 실제 물리적 이미지. 후자는 원본 이미지에 기발한 변화를 더한다. 이것이 새로운 형태의 모방인가?
‘모방’을 단순히 ‘복제’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이 단어에 부여한 의미를 상실시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에서 모방이 핵심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생각한 것은 현실 세계의 사물이 우리의 감각에 제공하는 이미지를 프레임 단위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을 자연 속에 이미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창조 과정을 따라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Physis는 그리스어로 ‘자연’을 의미하지만, 이것을 단지 ‘자연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집합으로만 이해한다면 다시금 그리스인들이 이 단어에 부여한 의미를 잊게 된다. Physis라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생겨나는 것”이며, 어근 phúō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가져오다, 생산하다, 형성하다, 성장하게 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Physis는 ‘자연계’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죽은’ 집합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역동적인 존재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연을 일종의 생산력으로 이해했으며, 생물이 피고 시드는 순환 과정, 생명이 나타났다가 허무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식 모방 개념이 바로 밈의 본질인가?
밈은 밈 패턴과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이미지의 결합이다. 밈이 복제될 수 있는 한, 그것은 살아있다(밈은 죽을 수도 있고 잊힐 수도 있다). 그러나 단지 밈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은 오히려 그 죽음을 가속화한다. 밈이 생존하려면 패턴의 새로운 변형이 필요하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미 깨달았듯이, 정체성의 기반은 변화에 있다. 강물의 물이 흐름을 멈추면 고여버리고, 강은 더 이상 순수함을 유지하지 못하며 곧 사라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밈을 구성하는 정보의 흐름(우리 눈앞의 픽셀로 변환된 데이터)도 영원히 변화해야만 밈은 밈으로 남을 수 있다.
따라서 밈을 만든다는 것은 Ctrl+C와 Ctrl+V 명령어를 통한 기계적 복제 활동으로 단순화될 수 없다.
오히려 이는 무한한 파생물을 포함할 수 있는 밈 패턴에 익숙해져야 하며, 특정 밈 이미지 내에서 이를 실현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예술가의 임무다. 예술가는 자연이 감각에 주는 색채를 단순히 모방하여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창조적 힘으로서 모방한다. 예술가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며 자연의 창조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밈은 새로운 예술 형식인가?
우리는 밈 속에 존재하는 모방의 유형을 묻고자 한다. 모방을 주제로 하는 예술 장르에서는 실제 존재하는 사물(사람, 풍경 등)이 모방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밈에서는 오직 밈 자체만이 모방의 대상이다. 예술 작품은 독일적인 경우(예: 한 점의 그림, 원본은 하나뿐) 혹은 복제 가능한 경우(사진 등)로 나뉘는데, 후자의 경우라도 작품은 항상 동일한 형태로 복제된다. 즉 복제본은 내용을 수정하지 않고 전파 목적만을 위해 만들어진다. 반면 밈은 변화를 통해 복제된다.
예술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원형이나 창작 과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예술은 재료 속에 포함된 무한한 가능성을 하나의 구체적인 방향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반면 밈은 그런 형식을 포기한다. 예술가가 무한한 가능성을 하나의 최종적이고 확정적인 예술 작품으로 고정시키는 대신, 밈은 하나의 조리법에 내재된 모든 가능성을 드러냄으로써 그 조리법을 고갈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만약 밈이 예술이라면, 그것은 끊임없는 변화를 통한 창조적 복제를 전제로 하는 독특한 매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새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예술 작품은 작가의 의도대로 복제 가능한 고정된 구성물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새로운 발상이다. 과거에는 음악 작품도 끊임없는 재연에 의존했다. 음악 작품의 공식 버전, 즉 녹음본은 영구적으로 수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악보(=밈 패턴)를 매번 연주할 때마다 작품 자체가 새로이 재해석된다. 영화와 연극의 현장 공연 사이에도 유사한 관계가 존재한다. 사실 작품의 저자라는 개념 자체도 우연한 산물이다. 오랜 기간 동안 시는 익명의 작품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다양한 파생물(적어도 기억의 한계 내에서 최소한의 변화를 포함)로 복제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현상처럼 보이는 것을 선택하여 살펴보다가, 그것이 오래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음을 발견한다.
만약 밈이 예술이라면, 그것은 수 세기에 걸쳐 우리 예술 개념의 핵심을 형성해온 가정들을 도전한다. 밈에는 저자가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익명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명의 예술가가 만든 작품이 아니다. 밈은 잠재적으로 무한한 수의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고 수정되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 밈은 고정된 형태가 없다. 그것은 원형 패턴의 잠재적으로 무한한 변화의 결과물이다. 예술가의 창작 과정에서 패턴은 단지 초안 단계의 안내 역할을 하는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처럼, 작품이 완성되면 패턴은 버려진다. 사소해 보일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어떤 예술 작품도 자신이 어떻게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추상적 개념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밈은 개념과 작품 간의 관계를 뒤집는다. 특정 이미지가 구현하는 패턴보다 패턴 자체가 더 중요하다. 특정 이미지는 패턴을 재활용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밈은 정말로 예술인가?
모든 종류의 예술에서 가치는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 속에 있는 듯하다. 예술 작품은 밈처럼 설명될 수 없다. 이 점에서 밈은 예술보다는 농담에 더 가까워 보인다. 밈은 쉽게 이해될 수 있으며, 설명하기도 쉽다. 예술 작품은 그렇지 않다. 예술 작품도 해석될 수 있지만, 개인이 작품을 체험하는 직접적 경험은 타인과 결코 동일하게 비교될 수 없다. 또한 모든 위대한 예술 작품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을 허용한다. 이는 밈에 대해선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아마 우리는 좀 더 단순한 질문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밈이 유쾌할 필요는 없다면, 밈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모든 밈은 적어도 한 집단 이상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해되지 않는 밈, 즉 원본 패턴에서 너무 멀어진 파생물은 나쁜 밈이다. 그러나 패턴에 익숙하다는 것만으로는 밈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파생물은 공유된 지식과 참조 자료를 바탕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밈 체험에 포함된 세 번째 요소다(밈 이미지 + 밈 패턴 + 공유된 의미의 세계). 예를 들어 주어진 밈 패턴은 미국 정치 세계, TV 시리즈(『신세기 에반게리온』), 심지어 과학계의 공유 지식 위에서도 구현될 수 있다.
결국 밈은 또 다른 의미에서 원시적(primitive)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마치 밈이 생성해야 하는 것은 소속감인 것 같다. 우리가 밈을 이해할 때, 우리는 단지 패턴에 익숙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건 쉽게 설명 가능하다)을 넘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공유된 의미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점이다.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철학 밈들 속에서 공유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밈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적어도 철학을 조금은 공부한 사람들의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 자체도 밈인가?
이러한 형태의 부족적 소속감은 예술 속에도 존재한다. 고대 신화의 전설들이 공유된 의미의 세계를 이루며, 그에 대한 공감이 개인의 공동체 내 소속감을 검증해주는 것이 아닌가?
밈은 예술이지만 동시에 반(反)예술이다. 밈은 근대 이후 예술이 거부했던 모든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밈은 고정된 형태가 없으며, 저자도 없다(익명이든 아니든). 그 주요 기능은 종족적 소속감인데, 예술이 종교와 정치 권력으로부터 해방된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았던 기능이다. 근대 예술이 작가의 개성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작가상을 강조하는 반면, 밈의 본질은 집단 창작을 통한 무한한 작품 생산을 통해 주체 간의 정체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밈은 인터넷의 산물로서, 비권위적 정체성에 반응할 수 있게 한다. 실제로 밈은 정치 이데올로기나 의제를 홍보하고, 많은 사람들이 일반화된 기준 아래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밈을 공유하는 데 헌신하는 소규모 집단들을 분석해보면, 우리 시대의 정체성이 다양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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